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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스한 오후 햇살이 버스 창문을 두드리며 속삭이던 8월의 어느 날. 서울 양재동의 플루티스트 김나원의 스튜디오에서 맑은 자연과 여유로운 휴식을 맛보았다. 스튜디오에서 볼 수 없을 법한 단아하면서도 차분한 그만의 공간은 탁해진 사회를 정화시켜줄 특화된 음악적 공간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값지게 가치를 높이는 의미 있는 일을 실천하고 있는 그이기에 더욱 그의 스튜디오는 따뜻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눔과 봉사’에 더 나은 가치를 두고 하나를 열배로 키우는 방법을 실천해 나가고 있는 그를 만나보았다.

    의심 없이 꿈을 향해 나가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음악이란 참 신기하다. 선율에 실리는 감정은 추억 속으로 데려다 놓는가 하면 때론 웃음을, 때론 눈물을 흘리게 한다. 김나원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무엇일까. 겸손하면서도 진심어린 그녀의 당당함은 재능과 가르침에 대한 열정, 그리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사람을 감동시킬 줄 아는 음악인이다.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마법 같은 음악의 힘을 그대로 전달할 줄 아는, 세상과 소통할 줄 아는 그이기에 음악이 가져다주는 가치와 열정은 어느 것에도 거침없어 보인다.
    그에게 ‘적당히’라는 말은 없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음악이야기이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의 음악적 열정은 거침없으며 그의 연주에는 음악의 역사가 그대로 살아 움직인다.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 얼마나 큰 고통과 역경을 이겨냈을까.
    클래식을 좋아하는 부모님 덕분에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클래식에 입문하는 김나원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눈에 담기에 벅찰 만큼 아름다운 플루트를 처음 만났다. 하지만 녹록치 않은 상대였다. 예원을 준비하던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이겨내지 못하고 플루트와 이별을 선언했지만 완전히 떠나지는 못했다. 자신에게 플루트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헤어져보니 더 애틋했다고. 그래서 그는 다시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다.
    “막상 플루트를 안한다고 생각하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더군요. 굉장히 불안하더라고요. 오히려 제 인생에 있어서 플루트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플루트를 잡았다. 그리고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플루트 연습에 몰입했다. 스스로 결심을 한 시기부터 그는 강해진 것이다. 오히려 스스로 결심한 후 플루트에 대한 관심과 욕심이 생겨 친구들과 음악적인 교류도 늘었다. 이때의 경험으로 지금 그녀가 가르치는 제자들의 부모들이 이런 고민을 늘어놓을 때면 아이가 하고 싶다는 표현을 할 때까지 기다려주라고 조언한다. 플루트가 아니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어릴 적부터 음악적으로 타고 났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사실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음악적 감각도 타고 나야 한다고 보지만 스스로 얼마만큼 노력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거든요.”
    그 이후 김나원은 어느 것 하나 소홀 할 수 없었다. 그의 음악적 승부근성은 이때부터 발현돼 고1때는 하루 10시간을 목표로 새벽1시, 2시까지 연습의 연습을 거듭할 정도로 무섭게 내달렸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서울대 플루트 전공 최초의 박사학위를 수여했을 뿐만 아니라 일리노이 박사 재학시절 성적 4.0이상의 학생들만 등록된다는 ‘그릭소사이어티 멤버’로 당당히 활동하기까지 했으며 2006년에는 한국의 10대 플루티스트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음악을 재생하던 그 순간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고등학교 시절 대학입시가 유일한 목표였던 서울대를 입학하고 나니 더 이상 플루트를 하고 싶은 동기가 사라졌다. 스스로 플루트가 좋아 악바리 근성까지 동원해가며 힘들게 일궈낸 것을 왜 한순간 버리려고 했을까. 음악을 즐기기 보다는 목표점을 향해 끝도 모를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쾌감에 더 이상의 목표점을 잃고 더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나.
    사실 우리네 학생들은 자신을 너무 혹사한다. 자신을 해치는 일이어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강박관념 때문일 것이다. 대학이 최종의 목표인 냥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경쟁은 치열하게 이루어진다. 삶의 행복이 눈앞의 등수놀이로 치환되는 세상을 연습하는 셈이다. 대학은 이제 그런 삶으로부터의 해방의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미래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현재에 대한 성찰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김나원도 지친 것이 아닐까. ‘더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 ‘더 치열하게 강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라는 것에서 좀 더 멀어지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마음이리라.
    그렇게 돌연히 김나원은 플루트에서 손을 뗐다. 졸업과 동시에 플루트를 집에 버려둔 채 홀연 캐나다 유학길에 올랐다. 플루트가 아닌 다른 인생을 찾아서 말이다.
    “음악 외에도 하고 싶은 공부가 많았어요. 그래서 플루트를 내버리듯 두고 유학길에 올랐지요. 숨이 제대로 쉬어 진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랍니다.”
    쉼 없이 달려온 시간의 치열함이 느껴지는 한 마디였다. 어찌됐든 그는 캐나다의 조그만 칼리지에서 어학연수를 받으며 자신이 하고 싶었던 공부를 마음 놓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운명이란 이런 것일까. 플루트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던 그의 결심이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음악대학에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한국인 플루트 전공생이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를 알게 돼 연주를 해보자는 가벼운 제의를 받게 된 것이다.
    악기가 없던 그는 학교의 악기로 연주를 했다. 그런데 그 날로 화제가 되고 말았다. 이후 플루트 교수가 찾아와 레슨을 해주겠다며 친절을 베풀었다.
    “그 선생님 덕분에 음악을 즐겁게 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어요. 당시 선생님은 저를 ‘burned out’되었다고 표현하셨지요. 사실 플루트는 저에게 경쟁의 도구였어요. 하지만 그분은 그 치열한 경쟁에 지쳐있었던 저에게 플루트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주셨죠.”
    플루티스트로서 재기의 희망이 보이지 않던 공백 기간에 그 곳에서 만난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시간을 즐기며 하루에 한 시간씩 박자기를 틀어놓고 타파넬-소노리테를 매일 연습했다. 호흡은 줄넘기, 수영, 달리기 등을 통해 잡았다.
    “음악이란 것이 올라가기는 힘든데 떨어지는 건 참 쉬워요. 그래서 예술계통에 있는 사람들에게 꾸준히, 성실히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지요. 제일 어려운 말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곡은 쉽고 재미있는 곡으로 먼저 시작했어요.”
    그 후 그 곳의 선생님 제안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보스턴으로 그녀가 연주한 바흐 소타나와 모차르트 콘체르토를 담아 진학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다시 김나원은 플루티스트로서의 첫 걸음을 내딛는 계기가 되었다.
     

    영혼이 있는 음악인으로서의 진정한 승부사

    보스턴대학에서의 유학생활은 김나원의 장점과 단점을 충분히 다룰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그의 스승은 보스턴 심포니 역사상 최초의 여성 연주자로 유명한 도리오 앤써니 드와이어 교수로, 그에게서 호흡을 안배하고 피아니시모를 연주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특히 김나원은 크고 건강한 소리를 내는 것이 큰 장점인 반면 섬세한 표현들이 부족하다는 도리오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작고 예쁜 소리를 배웠다. 그 후 그는 썸머뮤직캠프를 통해 로라 길버트 교수를 만나게 된다. 로라 길버트는 김나원의 장점을 더 키워준 스승으로 크고 건강한 소리를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초기 레슨 때는 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리버만 소나타, 이베르, 졸리베 등 미국의 현대 작곡가의 곡을 다루며 그동안 사그라져 있던 저의 소리를 끌어올려주셨답니다. 그 이후에는 바흐 무반주 소나타 같은 바로크시대의 곡을 다루며 도리오 선생님에게 배웠던 섬세한 표현들을 연주에 담게 해 주셨지요.”
    로라 길버트 교수는 제자를 가르칠 때 자신의 방법을 고집하기 보다는 학생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주는 최고의 스승이었다고 소개하는 김나원은 음악적인 것 외에도 플루티스트로서 살기 위한 꾸준하고 체계적인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잡아주었다고 설명한다. 지금도 2시간씩 매일 하고 있는 소리, 피아니시모, 비브라토, 타파넬 연습이 바로 그것이다.
    로라 길버트 교수를 통해 플루트를 더 사랑하게 된 김나원은 음악학으로 유명한 일리노이 주립대에 지원해 그 곳에서 공부에 파묻혀 살았다. 이곳에서 만난 알렉스 머레이 교수에게 알렉산더 플루트라는 새로운 플루트 교수법을 배우게 되었다. 알렉스 머레이는 알렉산더 테크닉이라는 호흡법을 개발한 교수로 당시 시카고 심포니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한편 김나원은 특히 박사과정 중 부전공으로 선택한 민족음악은 클래식만을 공부하던 그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과거로부터 현대까지 시간을 거슬러 여러 나라의 음악을 맛볼 수 있는 새로운 세계였기 때문이다.
    “민족음악학은 여러 분야가 혼합된 학문이에요. 음악이 중심이 돼 인류학, 사회학, 역사학 등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접근하기 힘들죠. 음악의 역사적 배경, 음악공부, 악기연주 등 공부는 할수록 더 궁금증이 유발됐고 책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어요. 도서관에서 살았던 그 때 공부가 정말 재미있었답니다.”
    그의 박사논문은 한국의 플루트 음악이 서양음악을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변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윤이상, 김정길, 서경선, 조민수 등의 작품을 다룬 그의 논문은 3년 반 만에 완성됐으며 이 논문은 700명 정도의 한국인 박사과정 학생 중 공대 학생 1명과 함께 A라는 성적으로 ‘그릭 소사이어티’에 들어가게 됐다.
    한편 김나원이 이 자리에 있기까지 자신을 위해 힘써준 또다른 스승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긴 시간동안 가르침을 주신 양혜숙 선생님과 마음속의 어머니와 같은 서울예고 문명자 선생님, 그리고 그가 멘토로 삼고 있는 김영미와 오신정 선생님.
    “김영미 선생님은 음악이 정말 아름다워요. 프레이즈 표현은 본받고 싶지요. 오신정 선생님은 대학시절 저를 가르쳐주신 스승으로 제가 원하는 소리를 갖고 계신 분이시죠. 두 분 모두 클래식의 문을 낮추는 노력을 많이 하고 계세요.”
    김나원은 말한다. 주위의 훌륭한 스승들이 있었기에 인생의 크고 작은 굴곡을 견딜 수 있는 버팀목이 될 수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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