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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 없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배워라

    조선의 지식인 중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사람은 누구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다산 정약용이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현존하는 책의 양으로 봐도 정약용이 단연 앞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남아 있지는 않지만 대략 1000권의 책을 썼다고 알려진 인물이 있다. 그 신화적인 학자는 대체 누구일까? 

    바로 19세기를 대표하는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과학 사상가인 혜강 최한기다. 참고로 그가 쓴 저술은 현재 10분의 1정도만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다.

    최한기는 세간에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나,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정약용의 뒤를 잇는 대학자로 기학을 통해 동서양의 학문을 통합시키고 평화 사상을 제시한 선각자다. 

    여기서 말하는 '기학'이란 동양의 기 철학과 서양의 물리학을 접목시켜 이론으로 체계화한 학문을 뜻한다.

    서양의 과학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해 이해하는 데 반해 최한기의 기학은 기의 움직임, 즉 문화를 통해 인간과 우주가 합일되어 있다고 여긴다. 전 세계가 하나로 통합될 것이라는 최한기의 '일통사상'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세계화'와 맞닿아 있다.


    운화로써 공부를 삼으면 공부가 모두 운화이므로
    일신의 문화로부터 사람과 접하는 운화에 이르고,
    천지의 문화까지 이루어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점차 두철하게 알아 공을 쌓고
    경험이 쌓여 성취에 도달하게 되니
    이것이 곧 공부다.


    최한기가 제시한 '운화의 법칙'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이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은 채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작동한다는 원리다. 최한기는 그러한 관계가 바로 공부의 핵심이자 토대라고생각했다.


    최한기의 사상과 공부는 정약용과 자주 비교되곤 한다. 정약용이 옛 경전을 재해석함으로써 개혁의 논리를 이끌어냈다면, 최한기는 현재를 중시했다. 그가 항해술이나 수학, 천문학 등 서양의 과학을 적극적으로 공부하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최한기가 주장한 기학은 다양한 학문을 분리하지 않고 통섭적으로 접근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그의 공부는 오늘날로 치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을 망라한 공부로 학문의 경계 없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평생에 걸쳐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과학을 하나의 학문 체계로 접목시키고자 노력한 최한기는 조선의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학문은 반드시 형체가 있어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처리할 수 있어야 하며, 반드시 이론으로 증명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최한기는 책을 읽고 연구하는 데에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투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누군가 그에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책을 많이 보느냐?"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기도 했다.


    가령 이 책을 쓴 사람이
    나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천리라도 불구하고 찾아가야 할 텐데,
    지금 나는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그를 만날 수 있네.
    책을 사는 데 돈이 많이 들긴 하지만
    양식을 싸 들고 멀리 찾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책을 읽고 쓰는 일에 평생을 바친 최한기는 자신의 집 대문과 마당, 서재에 선을 그어놓고 책을 1000권 읽은 사람, 5000권 읽은 사람, 1만 권 읽은 사람이 각각 들어올 수 있는 경계를 정해놓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최한기는 다른 무엇보다도 '경험'을 통한 배움을 중시했다.


    종을 치면 소리가 난다는 것을
    만약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면,
    종을 치기 전에 소리가 날 것을
    어찌 예측할 수 있겠는가?


    경험을 중시한 최한기는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남다른 견해와 주장을 펼쳤다. 그는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공부하는 방법과 대상이 달라져야 함을 강조했다.

     

    20대에는 분야를 가리지 말고
    폭넓게 공부하며 탐색해야 한다.
    30대에는 취사선택하여
    버릴 것은 버리고 얻을 것은 얻어야 한다.
    40대에는 세계와 자신을 연결해야 한다.
    모든 경험과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뒤
    그것을 다시 바깥으로 쏟아내야 한다.
    50대 이후에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보다는
    이미 공부한 분야의 내용을 간추려야 한다.


    독창적인 기의 세계를 열어젖히며 자기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최한기는 인간이 처음부터 뛰어난 지식과 기능을 갖추고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으로 끊임없이 발전해나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 공부란 어느 한 시점에 끝낼 수 없는, 평생에 걸쳐 적절한 방법을 택해 배워나가야 하는 삶의 동반자와 같은 활동이었다.

     


     

    출처 / 공부에 미친 사람들 / 김병완 지음 / 펴낸곳 다산북스


     

    혜강 최한기(1803~18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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