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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사르
    여러 차례 정복 전쟁에서 승리한 카이사르 동상(루브르 박물관

    카이사르 

    카이사르(기원전 100~44년)는 로마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크리수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를 수립했고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 원정하여 토벌했다. 크라수스가 죽은 뒤 폼페이우스마저 몰아내고 독재관이 되었으나, 공화정치를 옹호한 브루투스 등에게 암살되었다.

    카이사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로마의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유명한 명언을 많이 남긴 사람으로 이름이 나 있다. 영어로는 시저라고 읽는다.

    기원전 1~2세기 무렵, 소아시아의 흑해 연안에 폰토스라는 나라가 있었다. 지배자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 크리미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소아시아의 나라를 거의 다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선정을 베풀려고 애를 썼으나 로마와 몇 차례 전투를 벌이면서 술라나 폼페이우스에게 처참하게 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아들 파르나시즈의 반란으로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고 파르나시즈는 폼페이우스와 선린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에 정치적 대립이 일어나 내전으로까지 번지자 파르나시즈는 영토를 확장할 좋은 기회로 생각했다.

    이 내전에서 폼페이우스를 없앤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돌아오는 길에 소아시아에 들러 제라 시 근처에서 파르나시즈와 충돌했는데 이곳에서도 대승을 거두었다.

    그 사실을 로마의 친구에게 알리는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이 표현을 보면 카이사르는 천재적 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키케로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로마 제일의 웅변가였고 문장가이기도 했던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로마의 역사가이자 전기 작가인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전」에 따르면 이 말은 카이사르가 쓴 것이 아니라 카이사르가 로마에 개선했을 당시 길가에 나붙어 있던 글귀라고도 한다.

    카이사르가 한 말 중에는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도 유명하다.

    기원전 58년부터 8년간에 걸쳐서 알프스 산맥 너머의 갈리아(프랑스)를 정복한 카이사르는 알프스 남쪽 갈리아(북이탈리아)의 총독을 겸하면서 여러 종족을 정복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약탈을 일삼으며 부유한 도시를 공격해 닥치는 대로 재산을 불려 나갔다. 카이사르는 로마 최대의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로마를 비운 사이, 정적인 폼페이우스가 원로원과 결탁하여 그를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로 카이사르의 군대를 해체시키려 했다.

    대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깨달은 카이사르는 일단 화해를 제의했으나 폼페이우스가 수용할 리 없었다. 로마로 돌아가면 그 자리에서 잡혀 죽을 것이 뻔했기에 그는 마지막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기원전 49년, 마침내 카이사르는 로마와 가까운 북동해안의 라벤나로 가서 몰래 공연을 구경하고 건축 중인 무예연습장을 둘러보았다. 해가 저물자 카이사르는 경호원만 거느리고 뒷길로 해서 군주둔지에 닿았다.

    이때 그가 거느린 군사는 5천 명 남짓이었다. 그러나 로마와 경계인 루빈콘 강에 다다랐을 때, 그는 망설이지 않을수 없었다. 당시 북이탈리아에 속한 주와 로마령의 경계선을 넘을 때는 군사지휘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원로원의 명령이었다.

    "겁이 나면 지금 돌아가도 좋다. 이 다리를 넘어가면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이렇게 병사들에게 말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진군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진군하려는 카이사르와 병사들에게 용기와 힘을 실어 주었다.

    카이사르는 소리쳤다. "신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 자, 공격이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 졌다!"

    로마는 죽음을 각오한 이들의 공격에 혼비백산했고 폼페이우스 일당은 해외로 도망쳤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 피신해 있다가 다시 돌아왔지만 곧바로 암살당했다.

    카이사르는 이때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로마로 데리고 와서 아들 카이사리온(프롤레마이오스 15세)을 낳았다.

    폼페이우스 [기원전 106~48년]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장군. 정치가로, 아버지 휘하의 군인으로 첫발을 내디딘 다음, 술라의 지지자로서 정계에 등장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크라수스와 함께 기원전 70년에 콘술(집정관)이 되었다.

    기원전 67년에 로마를 괴롭혔던 해적을 지중해에서 일소해 버렸고, 기원전 63년까지 이집트를 제외한 동방을
    평정했다. 기원전 60년 크라수스, 카이사르와 함께 제1회 3두 정치를 실시하고 기원전 55년 다시 콘술이 되었으며, 기원전 52년에는 단독으로 콘술이 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와 대립하던 원로원 보수파의 충동으로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와 싸웠는데 패배하여 이집트로 도망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암살당했다.

     

    출처 : 교양으로 읽는 세계사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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